‘인권 없는 나라’에 살고 있는 여성 노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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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없는 나라’에 살고 있는 여성 노숙인
  • 류세나 기자
  • 승인 2009.02.28 1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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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피하려 거리 나섰다가 ‘거리피해자’로 전락…성범죄에 무방비 노출

여성대상 쉼터 전국 11개소 불과…종이상자 방패막 삼아 ‘선 잠’
쪽방비 대주면 성매매도 ‘OK’…여성 노숙인 한 명 두고 쟁탈전
자녀 동반 경우 생활고로 양육권 포기도…미성년자 노숙자 양산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미국發 금융위기가 불어 닥친 이후 ‘사업이 망해서’ ‘가족들 볼 면목이 없어서’ 등 갖가지 이유로 노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중 여성의 경우도 상당수인데 이들은 대부분 극심한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거리 역시 이들에게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가정폭력→가출→노숙→성폭행’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 여성노숙인들이 ‘가정 내 피해자’에서 ‘거리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있지만 이들을 위한 지원체계는 미비한 상태다. 여성노숙인들이 입소할 수 있는 시설은 전국에 11개소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대부분 서울 지역에만 편중돼 있는 형편이다. 인권 사각지대 중에서도 더욱 깊숙한 사각지대 속에 방치돼 있는 여성노숙인들을 위한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30대 후반의 여성 A씨는 지난해 10월 남편의 폭력을 피해 6살 난 아들 손을 잡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몇 년 전 실직한 남편이 술에 의존하면서부터 자신은 물론 아들에게까지 손찌검을 한 게 발단이 됐다. A씨는 식당보조 일을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왔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지면서 큰 빚을 지게 되자 그 길로 아이와 함께 줄행랑을 친 것이다.

지난 1월 서울의 한 모자쉼터에 입소한 A씨는 지금은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처음 두 달간은 ‘오늘 점심은 어린 아들의 끼니를 어떻게 때워야하나’라는 생각만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봉사단체의 무료급식이 가장 많다는 영등포역, 서울역 등을 전전하는 게 A씨의 일상이었다고.

하지만 쉼터에 입소한 지금도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는 게 A씨의 이야기다. 남자아이는 7살 이상이 되면 모자쉼터에서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A씨는 올해 6살인 아들이 7살이 되는 내년부터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쪽방촌, 예배당 등 숨어 지내는 ‘잠재적 여성노숙인’이 대부분

▲ 2007년 1월 1일 오전 많은 노숙자들이 2007년 새해 첫 끼니를 서울역 지하보도 무료급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지난 25일 한국교회봉사단이 발표한 ‘2009 노숙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노숙인 규모는 쉼터 보호 노숙인 3,875명, 거리 노숙인 1,588명 등 총 5,463명으로 파악됐으며 이중 여성노숙인들의 수는 약 10% 정도인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이 같은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거리 노숙인 통계의 경우 주요지역에서만 조사가 이뤄졌고, 또 조사당시 현장에 있던 노숙인들의 숫자만 파악된 것이므로 부정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훨씬 많은 수의 노숙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지만 정확한 수치는 가늠하기 어렵다.
또 여성노숙인의 경우 쪽방촌, 식당, 예배당, PC방, 찜질방 등을 전전하고 있는 잠재적 노숙인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상당수 여성노숙인들의 현황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이와 관련 열린여성센터 서정화 소장은 “보건복지가족부 등 정부기관 관계자들을 만나면 ‘거리에 여성노숙인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시설 정원도 남아있다’며 여성노숙인을 위한 지원을 확충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참 답답하다”며 운을 뗐다.

서 소장은 이어 “여성 노숙인들은 주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지낸다. 우리 센터를 찾아오는 여성들을 보면 교회 기도원, 병원 대합실, 작은 건물 계단, 창고 등에 숨어서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 많다”며 “별다른 대안이 없어 노숙을 시작했지만 ‘길거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보호시설의 정원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모자가족 시설의 경우 한 가족당 1실을 제공해 생활하도록 하고 있다. 보통 1실당 4명 정도의 인원이 책정돼 있는데 한 어머니에게 자녀가 3명이라면 정원이 딱 맞겠지만 자녀가 1명인 경우에는 실제로 남아있는 방은 없지만 집계상 2명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에 여성과 가족노숙인이 머무를 수 있는 보호시설의 정원은 약 300여개 정도다. 하지만 현재 추정되고 있는 여성∙가족 노숙인의 수치는 이를 훨씬 웃돌고 있는 상황. 게다가 이 같은 수치는 최근 들어 더욱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25일 한국교회봉사단이 발표한 ‘전국노숙인 수 5,463명’은 불과 6개월 전 보건복지가족부가 조사했을 당시보다 무려 1,015명이나 증가한 수치였다. 이는 갈 곳 없는 여성 노숙인 역시 증가했으며, 거리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여성노숙인들이 그만큼 더 많아졌다는 얘기로 귀결된다.

성폭행 당해 원치 않는 임신하기도

2007년 5월 노숙을 해오던 한 10대 소녀가 경기 수원시 한 남자고등학교 화단에서 온몸에 멍이 들고 머리에 상처를 입고 숨져 있는 채로 발견됐다. 경찰조사결과 이 소녀는 남성 노숙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나 종이상자, 신문지 등만이 이들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고 소수인 여성 노숙인들은 보다 쉽게 폭력과 성범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

이와 관련 한 쉼터 관계자는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여성의 경우 남자노숙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며 “이들은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여성 노숙인 한 명을 두고 여러 명의 남성 노숙인들이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한다는 게 이들 관계자들의 얘기다.

또 생계가 막막한 여성 노숙인들은 하루에 7천원 정도 되는 쪽방비를 대주거나, 음식을 주는 남성을 상대로 성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오랜 노숙생활로 성의식이 무너지고,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아 사리판단이 어두워졌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노숙인복지연구회가 2007년 서울지역 여성∙모자가족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이들은 거리노숙 경험기간 중 느낀 어려움 중 하나로 남성들로부터 오는 성적 요구나 위협을 꼽았다. 여성노숙인들은 이에 대한 대처법으로 안 보이는 곳에 숨는다(33.3%), 욕하고 싸워서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23.2%) 등 다소 막연한 방법을 꼽았다. 이들에게 도움을 줄 곳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

이와 관련 열린여성센터 서 소장은 “여성노숙인을 위한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거리 노숙 여성들 가운데 앞니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성 노숙자나 술 취한 행인들이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라며 “여성 노숙인 전용 쉼터를 확충해 이들을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고 모자 노숙인에게는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등 실질적 대응책 마련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최대 1년 안에 직장거처 다 마련 해라?

여성노숙자들만의 특징은 아이를 동반하고 있는 경우가 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모자 가정의 노숙원인은 대부분이 남편의 손찌검, 도박, 술버릇 등 가정폭력과 불화 때문이다.

단신여성과 모자가정을 위한 쉼터인 열린여성센터는 2월 기준 30여명의 여성노숙인이 입소해 있는데 이중 자녀와 함께 입소해있는 여성은 3명이나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아동의 기준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나이가 달라진다. 남자아이일 경우 7세이상이면 입소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서 시설에 입소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하곤 한다.

그러나 쉼터에 입소했다고 해서 태평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쉼터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최대 1년’으로 이 기간 안에 구직과 이후 생활에 대한 준비를 모두 끝마쳐야 한다. 하지만 사실상 1년 안에 새로운 직업을 갖고 아이를 키울 방을 얻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즉, 일정기간 후 또 다시 생활공간이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

이 같은 쉼터의 약점 때문에 아이를 가진 여성노숙인이 양육에 어려움을 느끼고 이 같은 부담을 견디다 못해 양육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미성년 노숙자 양산’이라는 2차 피해와 또 ‘아이가 쉽게 범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3차 피해까지 가져올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 한국교회봉사단 한 관계자는 “한국사회 전체인구의 15%인 700만명이 빈곤층이라는 사실은 향후 경제 사정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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