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軍, ‘치마 입은 군인’일 뿐인가…복종만 있을 뿐 인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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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軍, ‘치마 입은 군인’일 뿐인가…복종만 있을 뿐 인권은 없다
  • 류세나 기자
  • 승인 2009.02.2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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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중심∙폐쇄적 분위기에 성폭력 피해 신고 못 해…여군 내부에선 공공연한 비밀

군사법원서 군인이 재판관 노릇…계급서 밀리면 가해자로 탈바꿈
제보하려면 군복 벗을 각오해야…피해자 신분 쉽게 드러나기도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女軍이 피해자가 된 군대 내 성폭행, 성추행, 스토킹 등 성범죄 실태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고 있지 않았지만 이 같은 사건은 언론 등을 통해 심심치 들려온다. 하지만 외부로 알려진 사례는 실제 일어난 사건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 하다는 게 군 관계자와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주장이다. 이는 폐쇄적 성격을 가진 ‘군대’의 특성 탓도 있지만 철저한 계급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피해 여군들의 눈물은 상급자의 ‘명령’이라는 미명아래 숨겨져 왔고, 또 지금도 숨겨지고 있다는 게 이들의 의견이다. 특히 직업군인을 희망하고 있던 피해자들은 지속적인 군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피해사실을 숨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의든, 타의든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경우 진급이 어려워지는 것 뿐만 아니라 남은 군 생활마저 견뎌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해군의 한 여 부사관이 동료 남 부사관 3명으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온 것을 비관해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작금에는 단순 성폭행 사건과 그로 인한 2차 피해에 대한 이야기는 큰 이슈가 되지 못할 정도로 더욱 끔찍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쉬쉬되고 감춰져 왔던 여군에 대한 성폭력 피해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 경우는 보통의 성범죄 사건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여군 내부적으로는 이미 여군장교와 부사관들이 당하는 성폭행∙추행 등은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해 말에는 피해 여군이 오히려 피의자 입장이 돼 법정에 섰던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육군 박모(28∙여) 대위가 직속상관으로부터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인 스토킹을 당하고도 오히려 “상관의 말에 항명했다”는 이유로 헌병대의 조사를 받고 기소됐던 것.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스토킹 가해자가 헌병대에 고발?

▲ 지난해 8월 17일 오후 한강시민공원 여의지구에서 열린 하이서울 페스티벌 2008 여름축제 폐막행사에서 국방부 여군의장대가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특정 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2006년 12월 박 대위는 A사단으로 발령 받았다. 그로부터 2달여가 지난 다음해 2월 말부터 박 대위는 해당 사단에서 9년째 근무중이던 유부남 송모(38∙남) 소령으로부터 끊임없는 ‘호출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를 시작으로 휴일에도 번개통신(비상연락점검)을 하고 연락이 되지 않을 때면 한밤중에 숙소로 찾아오는 등 박 대위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만남을 요구했다. 조사결과 2007년 2월부터 6월까지 송 소령이 박 대위에게 전송한 문자메시지는 950여 통에 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남자친구와 자봤냐” 등 성적 질문을 일삼고 ‘남자친구 사귀지 말 것’ ‘숙소에 22시 이전에 복귀할 것’ ‘모든 월급 지출 내역을 보고할 것’ ‘외출 시 목적지와 누구를 만나는지 보고할 것’ 등이 적힌 각서에 서명하도록 한 것으로 밝혀졌다. 상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박 대위의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해 온 것이다.

하지만 군 생활을 지속하고 싶었던 박 대위 입장에서 상관의 스토킹을 상부에 보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박 대위는 송 소령의 전화 및 호출 중 업무와 관련된 것에만 간단히 답하고, 이외의 것에는 답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송 소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때 박 대위에게 헌병대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송 소령이 괘씸죄로 박 대위를 품위유지 위반, 직권남용, 항명 등 20여개의 죄명으로 헌병대에 내부 고발한 것.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박 대위는 송 소령의 스토킹 사실을 담은 진정서를 냈지만, 군 검찰은 2007년 12월 송 소령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반복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각서에 서명을 강요하는 등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피해자였던 박 대위는 항명과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돼 결국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6월을 선고 받았다.

현직 군인 재판관, 신뢰도 점수는…

이 같은 결과의 문제점은 1심인 군사법원에서 법관이 아닌 군인이 심판관으로 재판에 참여한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1심에서는 현직 군인인 심판관이 사실상 재판장 노릇을 하는데 피해자, 피의자가 재판장과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인연의 끈이 길고 두터운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1심에서 박 대위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장 김모 대령은 송 소령과 중령 시절부터 함께 근무했던 인연을 갖고 있으며, 진술을 번복해가며 박 대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행정장교는 송 소령과 대대 작전과장-작전장교로 함께 근무한 적 있던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당시 박 대위에게 자문을 줬던 前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이산 활동가는 “이 사건의 1심 재판과정은 사단 재판부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다”며 “재판부는 고발인 송 소령의 스토킹 사실이나 진술번복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고, 항소과정에서 사단 검찰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공판카드에 박 대위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과 박 대위의 지인이 외부단체에 본 사건을 알렸다는 내용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기재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 활동가는 이어 “이는 재판부가 사실관계에 근거하기보다 사건 당사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군에서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유리한 지를 바탕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초”라며 “이러한 군 사법체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은 계속 미궁으로 빠진 채 피해자만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국성폭력상담소 법정지원팀 이경환 군 법무관은 “최초에 가해자가 헌병대에 고발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 사건의 근원적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군 검찰은 오판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정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며 “법적으로 스토킹 피해를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한정되더라도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면 피해자의 행위는 충분히 다른 각도에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고 지적했다.

성폭력을 성폭력이라 말하지 못하고…

이산 활동가가 만난 한 여군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폭력 사고가 터지면 높은 사람들은 ‘왜 일찍 찾아와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헌병대에 신고를 하면 ‘사고 사례’로 처리돼 군생활에 지장을 받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알릴 수 있겠는가. 때문에 피해자들은 신고를 꺼리고, 자연스레 심각한 성범죄도 대부분 은폐된 채 넘어간다. 또 담당 관계자들이 사건을 비밀리에 부치더라도 여군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사건을 제보한 피해자가 누구인지 금방 드러나 2차 피해역시 여군들의 몫이다.”

한편 박 대위는 스토킹을 당한 지 22개월, 억울하게 헌병대 수사를 당한 지 14개월, 기소된 지 11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말,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현재 새로운 보직을 받아 A사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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